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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화 뾰족한 타자, zizi

내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일들은 모두 역으로 나를 찔렀다.

당시 나는 프랑스 렌느에서 유학 중이었고, 예술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 겨우 1년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잠시 가족 행사로 한국에 들러 보낸 십여 일 동안, 같은 해 여름 만났던 대학 선배와의 아이가 생긴 것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날 밤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음 날 나는 홀로 프랑스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20대 내내 열병처럼 세상을 향한 터질 듯한 호기심과 그 속에서 모든 경험을 주저하지 않았던 나는, 이 또한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2013년 가을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얼마나 다른 열병인지, 20대의 끝자락에서 겪고 있던 무질서한 혼란을 지나고 있음을, 더 거대한 혼란이 닥쳐오고 있음을, 그러나 그 속에서 어떤 거대한 질서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이 이후 나의 길을 안내할 징표가 되리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알 수 없었다. 이 세계는 너무도 거대하고 광활했기에, 그 희미한 징표가 이 거대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내가 너무도 작은 변화와 발견에도 쉽게 흔들리는 예민하고 빈약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에게 예술은 주어진 자원을 활용해 최고의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 사건 또한 단지 주어진 조건의 변화일 뿐으로, ‘내게 생겨난 일’은 그저 또 하나의 새로운 변화, 나에게 주어진 또 다른 ‘재료’라 여겼다. 나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어떤 예술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시간과 함께 변화하는 몸과 주변 사람들 속에서 어떤 예술적 가능성이 있을지가 궁금했고, 관찰했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새롭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찬 시간이었다.

그러나 임신 후 5개월, 프랑스 주치의가 초음파를 보며 내게 건넨 “zizi(지지)”라는 단어는 나를 날카롭게 관통했다. 내 몸속에 남성의 성기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프랑스어로 ‘작은 고추’라는 귀여운 단어가 그 순간 나에게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몸속에 알지 못하게 들어온 뾰족한 바늘처럼 언제든 내 안의 막을 찌를 것 같았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 뾰족한 무엇이 찌를 대상이 자궁이라는 공간임을 깨달았다.

이후 나는 이질적인 몸으로 예술을 계속할 수 있을지 두려워졌다. 마지막 선택지였던 예술은 모든 의문을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희망으로 가득 찬 길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쩌면 무덤 같았다. 이전에는 내 안에서 밖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 창조적인 일이라 여겼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내 안에서 물질적으로 내가 아닌 무엇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물론 캔버스를 만들고 설치물을 들고 붙이는 육체적 노동에 대한 압박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불안은 이제 막 예술가로 살아가겠다고, 창조해 나가겠다고 공공연히 그리고 나 자신에게 선포한 가운데, 나의 개입 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이 생명체의 존재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을 내뱉을 수 없는 답답함이 더욱 나를 두렵게 했다.

나의 예술은 어떻게 될까. 나는 무언가의 모체가 된 후에도 창작 행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무력하고, 불안하고, 매일이 지옥 같았다.

자궁은 그렇게 나의 온 세상을 뒤흔들며 존재감을 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