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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2(화) 두정위(頭頂位)
D+7(편)
*이번 화는 제 4-1화 “두정위(頭頂位): 움-므 [wuːmɯ], 준비된 태아를 위하여” 편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갑작스러운 임신 외에 뚜렷한 목적이 있던 것 같지 않다. 나는 당시 학생들끼리 공유하는 꼴로까시옹(Colocation) 형태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주민들을 위한 지하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장은 직사각형 큐브 형태로 나뉘어 있었고, 습기가 차고, 어두운 조명으로 다소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하게도 그 공간에 끌렸다. 이런 생각이 들고 나니 망설임 없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난 고든 매타-클락(Gordon Matta-Clark, 1943-1978)의 절단(Splitting, 1974)과 원뿔형 교차(Conical Intersect, 1975) 따위의 공간 확장 개념의 작업에 깊이 매료되어 있던 터였다.
지하 주차장에는 밖으로 향하는 작은 창문이 있었다. 창문을 통해 희미한 빛이 들어왔고, 간혹 사람들이 지나갈 때면 그림자처럼 움직임이 어른거렸다. 이따금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마치 태아의 심장 박동처럼, 은밀한 작업을 하는 와중에 나를 긴장시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앞으로 하게 될 작업을 정확히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규칙만은 있었다. 50세제곱 미터 지하 큐브 안을 주기적으로 빙글빙글 도는 것. 나는 매주 그렇게 조용히 그곳에서 스스로 정한 행위를 실천했다. 그렇게 특별한 의미 없이 반복적인 행위를 이어가며, 조용하고 사람 발길이 뜸한 그곳에서 나는 점차 스스로의 감각에 온전히 몰입해 갔다.
그렇게, 어떤 날은 큐브가 넓게 느껴지다가도 또 다른 날은 한 없이 좁아 답답함에 숨이 막히기도 했다. 그러다 좀 더 공간을 가까이 느끼고 싶어서 물을 뿌리며 작업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물을 조금씩 뿌리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 배가 불러올수록 물의 양도 점점 늘어났다. 마지막에는 벽과 바닥이 흥건할 정도로 물을 뿌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는 날도 있다.
몇 주가 지났을까. 누군가에게는 다소 기묘하게 보일 수 있는 의식을 이어가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내 몸과 공간이 하나로 연결된 듯했다. 발끝에 닿는 물은 차갑다가도 따뜻해졌고, 지하의 큐브를 도는 발걸음은 배가 불러오고 몸이 무거워지면서 점점 더디고 묵직해졌다. 내 몸, 나의 의식에 따라 달라지는 감각들에 자유를 느꼈다.
두정위(頭頂位): 모체의 자궁에서 40주 동안 위치를 바꿔가던 태아가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며 머리를 아래로 돌려 자리를 잡는 과정.
2011년 겨울, 나의 <Womb -Le Corps Dans L’Espace>는 어쩌면 내가 앞으로 마주할 세상 속에서 나만의 ‘두정위’를 찾아가는 행위였던 것은 아닐까. 이제와 돌아보니, 묻지 않고 이끌리는 대로 선택하고 작업했던 지난 13년의 시간들이 하나씩 퍼즐처럼 맞춰지는 것 같기도 하다.
위의 글은 원래 11월 7일 예정되었던 수술 전에 쓰려고 했던, 예전 작업 이야기 중 하나다. 첫 번째 이야기였는데 생각보다 길어지고 말았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최근 들어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사실 오늘은 11월 14일, 수술 예정일이었던 11월 7일을 이미 일주일이나 넘긴 날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수술 예정일을 지나면서부터 자궁과 모체(나)의 관계는 기이하게 엉켜버리고 있다. 피브롬은 오늘도 나의 ‘움-므 [wuːmɯ]’ 속에서 자라나는 중이다. 피브롬 D+7.